오프라는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6년 동안 줄곧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자랐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조부모는 어린 오프라에게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오프라는 할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할아버지는 굉장히 무서워했다. 할아버지 얼레스 리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어서, 지금도 오프라는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지팡이를 휘둘러대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겁에 질리곤 한다.
오프라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농민이었다. 너무나 작아서 농장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의 땅만을 가지고 있는 농민이었다. 그들은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도 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우물을 이용했는데, 양동이로 물을 길어오는 일은 어린 오프라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들이 지금의 오프라가 연기를 하는데 있어 많은 부분 도움이 되고 있다는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TV용 영화 <브루스터 플레이스>에서 오프라가 닭에게 모이를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중에 오프라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게 아니에요. 실제 경험을 가지고 있거든요. 네 살 때 할머니 농장에서 '이리 온, 꼬꼬닭아, 구구구...' 하며 닭에게 모이를 주곤 했어요. 그 일은 건강에는 아주 좋았겠지만 따분한 일이었죠. 영화에서 5분 동안 연기를 하는 거라면 무척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매일 모이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 재미있지만은 않을거에요."
오프라의 기억 속에서 그래도 즐거웠던 일은, 할머니가 난로 위에 음식을 올려놓으시며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식성이 좋아 뭐든 잘 먹었다. 부서진 치즈 조각, 버터를 살짝 얹은 비스킷, 집에서 직접 만든 햄, 햄 즙으로 만든 육즙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아침 식사에 불과했다. 훈제 닭요리, 버터를 듬뿍 바른 콩 요리, 기름에 튀긴 옥수수, 옥수수빵 등은 매일매일의 만찬 메뉴였다.
오프라의 집에는 종종 아랫마을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하곤 했는데, 그런 날은 잔치라도 벌이는 것처럼 음식이 넘쳐났다. 식탁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음식을 올려놓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처럼 음식을 풍성하게 잘 차려서 먹는 문화 속에서 자랐던 오프라이니 만큼 먹는 것을 절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오프라의 할머니 해티 매 블락은 매우 엄격하게 손녀딸을 교육시켰다. 할머니의 엄격한 교육은 오프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프라 자신도 할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지금의 건강과 사고력 등 오프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할머니와 함께했던 6년 동안 생겨났다는 것이다.
오프라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신발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매년 오프라에게 두 켤레의 신발을 사주었지만, 시골 농장에서 생활하면서 옷조차도 제대로 갖추어 입는 편이 아니었던 오프라는 주로 맨발로 돌아다녔을 것이고, 그래서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녀가 신발을 신는 날은 교회에 가는 일요일 하루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할머니가 그녀를 제대로 키우려고 노력했음은 오프라 자신도 부인하지 않는다.
오프라가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추억이 하나 있다. 그녀는 따스한 햇볓이 내리비치는 현관에서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 머리칼을 만져주는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곤 했다. 할머니는 오프라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기름을 발라주곤 했는데, 어머니들이 현관 앞에 앉아 어린 딸의 머리를 만져주는 것은 남부의 흑인들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유년 시절의 따뜻한 추억들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할머니가 벌을 줄 때면 정도 이상으로 가혹했다고 말한다. 오프라의 할머니는 매우 엄격해서 한 번 매질이 시작되면 며칠이고 지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오프라의 유일한 소망은 백인 아이가 되는 거였다. 왜냐하면 오프라가 생각한 백인들은 아이들에게 매질 대신 설득했기 때문이다.
오프라가 이처럼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오프라는 종종 부모님의 관계를 두고 "오크나무 아래서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실수"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 버논 윈프리는 어머니인 버니타가 임신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출생증명서와 함께 아기의 옷을 부탁해오자 그제야 오프라가 자기 딸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흑인 미혼모의 딸로 태어난 오프라,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녀가 오늘날의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 여성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상하수도 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나가야만 했던 미시시피에 살던 시절에는 어느 사람도 그녀가 미시시피의 공장이나 목화밭에서 일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미시시피 시골의 가난한 흑인 미혼모의 딸을 여왕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프라의 가슴 깊은 곳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강렬한 소망이 있었다. 아니,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성공의 자리에 올라서는 본보기가 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녀 역시 어렸을 적에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고, 이후 엄마와 함께 지내다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했지만, 그녀는 그것에 감사한다. 그런 다양한 환경을 접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프라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가난하고 불쌍한 빈민촌의 소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자신뿐이며, 자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머리에 열일곱 개의 다양한 핀을 꽂은 어린 흑인 소녀였을 뿐이지만, 자신을 유명한 아역스타 셜리 템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자신이 셜리 템플처럼 유명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프라. 그녀는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마을에서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면 목사님은 "자, 이제 윈프리 양이 앞에 나와 성경 암송을 하겠어요"라며 소개하곤 했다. 그녀는 유창하게 성경구절을 암송했고, 그런 오프라를 보면서 할머니의 친구들은 "이봐, 해티, 네 손녀딸은 정말 천재야!" 하며 감탄하곤 했다.
오프라는 할머니 친구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자신감이 자신을 축복과 은총이 넘치는 지금의 자리로 안내했다고 그녀는 믿는다. 오프라의 말대로,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신의 은총이 당신을 낚아채어 가도록 하는 것이니까.
오프라가 여섯 살 때까지 살았던 미시시피 코시우스코에 있는 오래된 농장 앞으로 길이 하나 나 있다. 사람들은 이 길을 '오프라 윈프리의 길'이라고 부른다. 오프라가 살던 집은 그곳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는 미시시피 코시우스코의 신화로서 그곳에 남아 있다.
정말 대단한 오프라 윈프리의 어린시절과 삶의 뿌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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